
줄거리 요약
아그네스(Agnes)는 조용한 시골의 한 리버럴 아트스 칼리지에서 영문학 교수로 일하며 고양이와 함께 살고 있습니다. 영화가 시작될 때 그녀는 학문적인 안정과 평온을 유지하는 듯 보이지만, 한편으로는 내면에 깊이 자리 잡은 어떤 감정적 상처를 간직하고 있습니다.
어느 날 뉴욕에서 아그네스의 오랜 친구 리디(Lydie)가 임신 소식을 전하며 찾아오고, 두 사람은 식사를 하며 옛 시절을 회상합니다. 하지만 표면적인 즐거움 뒤에는 설명되지 않은 긴장감이 흐르고, 관객은 곧 아그네스에게 과거 큰 사건이 있었음을 알게 됩니다.
영화는 과거로 회귀해 아그네스의 대학원 시절을 보여줍니다. 그녀는 똑똑한 박사 후보생으로, 지도교수 프레스턴 데커(Preston Decker)의 특별한 관심을 받으며 장래가 촉망되는 존재였습니다. 데커는 아그네스의 논문 초고에 대한 과찬을 하며, 자신의 첫판 희귀본 문학 도서를 보여주기도 합니다.
그러나 곧이어 둘은 데커의 집에서 논문에 대해 더 논의하기로 했던 밤, “그 일”이 일어나게 됩니다. 아그네스는 중간에 집을 떠나지만, 이후 그녀의 말과 행동으로 인해 관객은 데커가 그녀를 성폭행했다는 것을 분명히 알게 됩니다. 영화는 이 사건 자체를 노골적으로 보여주지는 않지만, 그 여파와 감정의 흔적을 섬세하게 그려냅니다.
사건 이후 아그네스는 극도로 감정이 무뎌진 상태가 됩니다. 그녀는 길에서 떠돌이 새끼 고양이를 데려오며 일상의 작은 돌봄을 통해 위안을 찾으려 하지만, 마음속 어두운 구석은 쉽게 가시지 않습니다. 친구 리디가 그녀를 위로하며 함께 화를 내고 때로는 무력감을 토로하는 동안에도, 아그네스는 분노와 슬픔, 혼란스러움의 범벅 속에서 길을 찾기 위해 애씁니다.
그녀는 데커에 대해 학교 당국에 보고하지만, 이미 데커는 학교를 떠났기 때문에 조사나 징계가 어렵다는 답변만 들을 뿐입니다. 이 장면은 피해자가 제도적 장벽에 부딪히는 현실을 비판적으로 보여줍니다.
일련의 상황 속에서 아그네스는 아주 현실적인 고민을 합니다. 예를 들어, 데커를 고소하여 법적 처벌을 받게 한다는 선택지에 대해 스스로에게 질문합니다. 하지만 데커는 이미 자신의 전처와 아이를 함께 키우고 있어 그의 삶에 큰 타격을 주고 싶지 않다는 마음, 그리고 법적 절차가 가져올 긴 고통과 결과를 감내할 수 있을지에 대한 두려움 사이에서 갈등합니다.
결국 그녀는 처벌을 택하지 않기로 결정합니다. 이 장면은 복수나 정의가 반드시 상처를 치유하는 길이 아니라는 영화의 중요한 메시지를 제시합니다.
시간이 흘러 아그네스는 자신이 다녔던 대학에서 정교수로 일하게 되고, 우연히 데커의 이전 사무실을 배정받습니다. 이 사무실은 상징적으로 의미 깊은 공간으로, 아그네스의 과거와 현재가 교차하는 장소가 됩니다.
한 동료인 나타샤(Natasha)는 아그네스를 질투 섞인 태도로 대하며, 데커와 과거에 합의된 관계였음을 고백해 아그네스를 격렬한 감정으로 몰아넣습니다. 이는 그녀가 아직도 내면적으로 완전히 자유롭지 않음을 드러내는 계기입니다.
이후 아그네스는 이웃 개빈(Gavin)과 관계를 맺기도 하고, 배심원 의무를 수행하러 법정에 가기도 하며, 삶을 살아가면서 여러 작은 순간과 마주칩니다. 그러나 그녀에게 “그 일”은 여전히 그림자처럼 따라다닙니다.
영화는 이 모든 순간을 단선적인 힐링 서사로 그리지 않고, 삶 속에서 어떻게 기억과 회복이 병존하는지를 섬세하게 보여줍니다. 때로는 웃음이, 때로는 공허함이, 때로는 불안과 반복적인 감정이 교차합니다.
영화의 마지막에는 현재로 돌아와 리디가 아이를 낳은 모습을 통해 아그네스가 어떤 경지를 향해 나아가려 하는지 보여 줍니다. 그녀는 리디와 그의 배우자와 함께 시간을 보내고, 그들이 떠난 뒤 아이를 안고 조용히 이야기합니다. 그녀는 아이에게 “좋은 삶을 살기를” 바라는 마음과 동시에, 세상에는 나쁜 일도 있음을 솔직히 전하며 공감과 위로를 표현합니다.
이 장면은 아그네스가 과거의 사건을 극복했다기보다, 그것을 자신의 일부로 받아들이고 다른 이에게 연대와 따뜻함을 전하려 애쓰는 어른으로 성장했음을 암시합니다.
주요 인물 소개
아그네스 워드 (Agnes Ward) - 에바 빅터 (Eva Victor)
주인공 아그네스 워드는 영화의 중심 인물로, 미국 뉴잉글랜드의 한 작은 리버럴 아트스 칼리지에서 영문학 교수로 일하고 있는 젊은 여성이다. 그녀는 성실하고 지적이며 남다른 유머 감각을 지녔지만, 과거 대학원 시절 박사 논문을 준비하던 중 지도교수에게 심각한 트라우마를 당한다. 영화는 그 “나쁜 일”이 이미 벌어진 이후의 삶을 시간의 흐름 속에서 보여주며, 아그네스가 내면의 상처와 감정적 혼란, 회복의 과정과 비선형적 성장 과정을 담담하고 섬세하게 그려낸다.
리디 (Lydie) - 나오미 애키 (Naomi Ackie)
리디는 아그네스의 오랜 친구이자 동료 대학원 시절을 함께 보낸 사람으로, 아그네스의 내적 혼란과 트라우마 속에서 그녀의 가장 중요한 지지자 역할을 한다. 밝고 직관적이며 순발력 있는 성격을 가진 리디는 감정을 솔직하게 표현하면서도 친구를 진심으로 도우려는 따뜻함이 있다.
개빈 (Gavin) - 루카스 헤지스 (Lucas Hedges)
개빈은 아그네스의 이웃으로, 영화에서 아그네스와 잠시 관계를 갖는 인물이다. 조용하고 다정하지만 그의 기대와 아그네스가 원하는 관계의 방향성 사이에 미묘한 간극이 있어, 두 사람의 관계는 완전한 사랑으로 이어지진 않는다.
프레스턴 데커 (Preston Decker) - 루이스 캔셀미 (Louis Cancelmi)
프레스턴 데커는 아그네스가 대학원 시절 지도교수로 만난 인물로 영화에서 중요한 계기를 제공하는 인물이다. 탁월한 지식과 매너를 가진 인물처럼 보이지만, 이후 아그네스를 성적으로 공격하는 사건을 일으켜 그녀의 삶을 근본적으로 뒤흔들게 된다.
나타샤 (Natasha) - 켈리 맥코맥 (Kelly McCormack)
나타샤는 아그네스의 옛 친구이자 동료 대학원생으로, 아그네스가 시간이 흐른 뒤 같은 칼리지에 정교수로 임명되어 자리를 잡은 시점에 다시 등장한다. 그녀는 아그네스에게 과거 데커와 합의적인 관계를 가졌음을 털어놓으며, 아그네스의 감정적 균형을 무너뜨리는 역할을 한다.
피트 (Pete) - 존 캐럴 린치 (John Carroll Lynch)
피트는 영화에서 한 컷 등장하는 인물로, 아그네스가 공황 상태에 빠졌을 때 그녀를 진정시켜 주는 샌드위치 가게 주인이다. 그의 작은 친절은 아그네스가 자신의 감정과 현재 상황을 다시 정리할 수 있게 하는 한 순간으로 작용하며, 영화가 보여 주는 인간관계의 온도와 따뜻함을 상징적으로 보여 준다.
프랜 (Fran) - E. R. 파이트마스터 (E. R. Fightmaster)
프랜은 리디의 배우자로, 리디와 함께 아그네스를 찾아오는 인물이다. 프랜은 조용하지만 신뢰할 수 있는 존재로, 친구와 배우자의 결합된 지원 체계를 보여 준다. 그들의 관계는 아그네스가 과거의 고통으로부터 현재의 삶으로 조금씩 나아가는 데 있어 지지 구조를 시각적으로 상징하는 역할을 한다.
총평
영화《쏘리, 베이비 (Sorry, Baby, 2025)》는 하나의 사건을 둘러싼 극적인 전개보다는, 그 사건 이후에 남겨진 삶의 감정과 시간을 섬세하게 따라가는 작품이다. 이 영화는 성폭력이라는 무거운 주제를 다루고 있지만, 흔히 기대되는 고발적 서사나 법적 해결, 혹은 극적인 복수와 화해의 구조를 취하지 않는다.
대신 영화는 “이미 일어난 나쁜 일 이후에도 삶은 계속된다”는 전제를 바탕으로, 그 이후의 일상이 어떤 결로 이어지는지를 차분하고 정직하게 보여준다. 이러한 접근 방식은 동시대 트라우마 서사 가운데서도 매우 독특하고 인상적인 지점을 형성한다.
감독이자 주연을 맡은 에바 빅터는 이 작품을 통해 사건 그 자체보다도 사건이 개인의 내면과 관계, 시간 감각에 남기는 흔적에 집중한다. 주인공 아그네스는 겉으로 보기에는 안정적인 직업과 일상을 가진 인물이지만, 그녀의 말투와 행동, 침묵 사이에는 설명되지 않는 균열이 존재한다.
영화는 그 균열을 서서히 드러내며, 관객이 인물의 감정에 자연스럽게 스며들도록 유도한다. 과거와 현재를 오가는 비선형적 구조는 트라우마가 기억 속에서 작동하는 방식을 닮아 있으며, 이는 서사의 형식 자체가 주제를 반영하는 효과를 낳는다.
특히 높은 평가를 받는 이유는, 이 영화가 피해자를 단일한 고통의 이미지로 소비하지 않기 때문이다. 아그네스는 슬픔과 분노만을 지닌 인물이 아니라, 웃고 농담하며 때로는 어색한 침묵을 견디고, 관계 속에서 실수도 하는 복합적인 인간으로 그려진다. 영화는 그녀가 완전히 치유되거나 명확한 결론에 도달하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다.
대신 회복이란 직선적인 과정이 아니라, 나아갔다가 다시 흔들리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오는 반복적인 움직임임을 담담하게 제시한다. 이러한 태도는 현실의 감정 경험에 매우 가깝고, 그래서 더욱 깊은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연출 면에서도 이 영화는 절제된 미학을 유지한다. 카메라는 인물을 과도하게 몰아붙이거나 감정을 강요하지 않고, 일정한 거리를 유지한 채 관찰한다. 음악 또한 감정을 조작하기보다는 장면의 여백을 살리는 방향으로 사용된다. 이로 인해 영화 전반에는 잔잔하지만 긴 여운이 흐르며, 관객은 장면이 끝난 뒤에도 인물의 감정을 곱씹게 된다.
특히 일상의 사소한 순간들(친구와의 대화, 낯선 사람의 작은 친절, 혼자 있는 시간)이 반복적으로 등장하면서, 삶이 어떻게 고통과 함께 지속되는지를 자연스럽게 보여준다.
에바 빅터의 연기는 이 영화의 핵심적인 설득력이다. 그녀는 과장된 감정 표현 대신, 미묘한 표정 변화와 말 사이의 공백을 통해 아그네스의 내면을 드러낸다. 이러한 연기는 관객으로 하여금 인물의 감정을 해석하고 공감하도록 만들며, 수동적으로 감정을 소비하게 하지 않는다.
함께 등장하는 주변 인물들 또한 주인공의 이야기를 보조하는 도구가 아니라, 각자의 방식으로 삶을 살아가는 존재로 그려져 영화의 세계를 더욱 현실적으로 만든다. 특히 친구 리디와의 관계는 이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연대의 의미를 가장 잘 보여주는 축으로 기능한다.
비평적으로 볼 때, 트라우마를 다루는 영화의 새로운 방향을 제시한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많은 평론가들은 이 영화가 고통을 재현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 이후의 삶을 사는 인간의 복잡성과 존엄성을 존중한다는 점을 높이 평가했다.
동시에 유머와 일상의 가벼운 순간들을 배제하지 않음으로써, 고통과 삶이 반드시 분리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설득력 있게 전달한다. 다만 느린 호흡과 비선형 구조로 인해 명확한 서사적 쾌감을 기대한 관객에게는 다소 낯설게 느껴질 수 있다는 점에서 호불호가 갈리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쏘리, 베이비》는 단순히 한 편의 문제작이나 소수의 관객을 위한 영화에 머무르지 않는다. 이 작품은 상처를 겪은 이후에도 사람은 여전히 웃고, 관계를 맺고, 불완전한 선택을 하며 살아간다는 사실을 조용히, 그러나 단단하게 말한다.
영화가 끝난 뒤에도 관객의 마음속에 오래 남는 것은 극적인 장면이 아니라, 인물의 숨결과 침묵, 그리고 완전히 해결되지 않은 감정의 잔향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영화는 위로를 강요하지 않으면서도 깊은 공감을 건네는, 2025년을 대표하는 정서적 드라마 중 하나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