줄거리 요약
서울 어딘가, 청부살인도 이제는 '설계'의 시대다. ‘설계자’라 불리는 영일(강동원)은 의뢰받은 죽음을 자연스러운 사고사처럼 위장하는 일에 능한 계약 살인팀의 리더다. 그는 단순한 흉기를 들이대는 살인자와는 다르다. CCTV 각도, 목격자의 동선, 기상 조건까지 감안해 죽음이 ‘의심받지 않도록’ 설계하는 데 천재성을 보인다. 그와 함께하는 재키(이미숙)는 팀의 중추 역할을 해온 브레인, 월천(이현욱)은 변장과 잠입의 달인, 그리고 점만(탕준상)은 막내이자 행동대장 역할을 한다.
어느 날, 유력 검사장 후보 주성직(김홍파)의 딸 영선(정은채)으로부터 은밀한 의뢰가 들어온다. 대상은 휠체어에 탄 노인이며, 아무 의심 없이 ‘사고처럼’ 세상을 떠나야 한다는 조건이다. 의심을 피하기 위해 고안된 시나리오는 다수의 언론과 인파가 몰린 행사장에서 벌어지는 감전 사고. 영일은 철저하게 현장을 통제하고, 점만이 휠체어를 밀어 정해진 전기선 위로 유도하는 것으로 계획은 완성된다. 실행 당일, 모든 게 완벽하게 맞아떨어지며 노인의 죽음은 실제로 ‘우연한 사고’로 마무리된다.
하지만 사건 직후 예상치 못한 균열이 일어난다. 오랜 파트너 재키가 잠적하고, 점만은 의문의 사고로 목숨을 잃는다. 그제야 영일은 이번 의뢰가 단순한 살인이 아니었음을 직감한다. 그 뒤를 쫓는 과정에서 그는 점차 팀 내부에 배신자가 있음을 확신하게 되고, 특히 월천에게 의심을 품는다. 월천은 병원비를 위해 돈을 받은 사실은 인정하지만, 배신은 아니라며 반박한다. 하지만 이 의혹은 끝내 풀리지 않는다.
동시에 ‘클리너’라는 존재가 수면 위로 떠오른다. 이들은 ‘설계자’를 지우는 자들이며, 청부살인의 흔적을 없애기 위해 뒤처리를 담당하는 조직이라 전해진다. 영일은 보험사 간부 이치현(이무생)이 이들과 연루되어 있다고 의심하며 그를 추적하지만, 결국 그가 단지 보험 데이터 정리를 하던 인물임이 밝혀지고 만다. 이로써 영일의 확신은 점차 혼란으로 바뀐다. ‘클리너’라는 존재 자체가 실제 하는지, 아니면 자신의 죄책감과 피해망상이 만들어낸 허상인지조차 모호해진다.
결국 모든 연결고리가 끊긴 영일은 수사관 유경진(김신록)을 찾아가 자수한다. 그는 자신이 설계한 죽음과 그로 인해 무너진 삶에 책임을 지려 하지만, 경찰은 ‘클리너’라는 개념을 터무니없는 망상이라 치부한다. 하지만 마지막 장면, 누군가가 그의 책상 위에 플래시 소품을 다시 올려놓고 떠나는 장면은 ‘누군가는 지켜보고 있다’는 묘한 긴장감을 남긴다.
엔딩은 열린 결말로 마무리된다. 모든 걸 내려놓은 듯한 영일이 거리로 천천히 걸어 나가는 순간, 스크린 밖에서 차가 급정거하는 듯한 소리가 들려온다. 그것은 실제 사고일 수도 있고, 영일의 환청일 수도 있다. 결국 이 영화는 그가 쫓았던 ‘진짜 배후’가 현실이었는지, 혹은 그 스스로 만들어낸 심리적 환영이었는지에 대한 질문을 관객에게 던진다.
주요 인물 소개
영일(강동원)
주인공이자 ‘설계자’. 청부살인 조직의 리더로, 계약 살인을 겉보기엔 완벽한 사고사로 위장하는 데 천부적인 재능을 지녔다. 그는 대상의 일상, CCTV 동선, 기후, 목격자의 위치까지 계산해 ‘자연스러운 우연’을 설계한다. 그러나 완벽해 보이던 삶이 의문의 변수 팀원 점만의 죽음과 조작된 증거로 삐걱이기 시작하며, 영일은 자신이 조종하던 세계가 흔들리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이 과정에서 그는 ‘클리너’라 불리는 정체 불명의 조직, 내부 배신, 자신의 과오와 직면하며 점차 강박과 불신 속으로 빠져든다.
재키(이미숙)
영일의 오랜 동료이자 브레인 겸 실무 파트너. 경험 많은 베테랑으로, 전략과 계획의 중심에서 팀을 지탱하지만 월남전 후유증과 모르핀 중독으로 몸이 좋지 않다. 냉철하고 현실적인 그녀는 ‘클리너’ 존재를 믿지 않지만, 팀원들이 직면한 위험을 누구보다 먼저 감지하는 인물이다.
월천(이현욱)
변장과 잠입의 전문가. 남성임에도 여성 복장을 자유롭게 소화하는 크로스드레싱 연기로 신분 위장과 혼란을 설계한다 . 유연한 정체성과 창조적 속임수로 작전을 성공적으로 지원하지만, 동시에 내부 인물 중 의심받는 인물이기도 하다.
점만(탕준상)
팀의 막내이자 현장 행동대장. 신참이지만 오히려 신중함과 긴장감이 있어 영일에게는 잔잔한 위로가 된다. 그러나 첫 작전 중 예기치 못한 사고로 사망하면서, 사건의 향방이 급변한다.
이치현(이무생)
보험사 간부로, ‘클리너’ 조직과 연관이 의심되는 인물이다. 영일은 그를 배후로 의심하지만, 그는 단순히 보험 데이터를 정리하는 사람에 지나지 않았다. 영일의 망상과 실체 사이의 경계가 흐릿해지는 계기를 제공한다.
주성직(김홍파)·영선(정은채)
주성직은 유력 검사장 후보로, 영일의 이번 의뢰 대상이며, 영선은 그의 딸이자 의뢰자다. 정치적 언론의 주목 속에서 사고로 위장된 ‘형 광경’을 설계하려 하며, 사건의 원인을 제공하고 조직의 윤리와 균열을 드러낸다.
양경진(김신록)
서울중앙지검 사고담당 형사. 영일의 자수 이후 그를 수사하며, ‘클리너’라는 개념을 터무니없는 망상으로 치부하지만, 마지막 순간 플래시 소품이 책상 위에 놓이자 긴장을 놓지 않는다.
하우저(이동휘)
영일의 사이버 협조자. 작전 관련 허위 이슈를 만들어내고 데이터를 조작하는 인물로, 온라인 여론을 조작해 사고에 대한 의혹을 분산시킨다.
짝눈(이종석)
영일의 전 동료로 언급되며, 이전에 ‘클리너’ 조직에 살해당한 것으로 보인다. 사고 설계 실패 사례로서 영일에게 중요한 경고 역할로 작용한다.
총평
〈설계자〉은 매우 정교하게 설계된 플롯을 바탕으로 진행된다. 주인공 영일은 ‘사고를 위장한 죽음’을 설계해 고객의 의뢰를 완수하는 인물이다. 마치 연극을 연출하듯 주변 인물의 동선과 공간의 질서를 통제하며 하나의 완성된 ‘죽음의 무대’를 만들어낸다. 그가 설계한 세계는 철저히 통제되고, 계산되며, 오차가 없다. 그러나 동료의 갑작스러운 죽음을 기점으로 그의 세계는 조용히 무너져간다. '이건 설계된 게 아니야'라는 확신에서 출발한 그의 집착은 점차 광기로 변질되고, 그는 자신도 모르는 설계 안에 갇혀 점점 진실의 심연으로 빨려 들어간다.
이 영화의 강점은 무엇보다도 몰입도 높은 연출과 배우들의 밀도 있는 연기다. 특히 강동원은 냉철한 두뇌와 감정의 격랑 사이를 오가는 영일이라는 인물을 절제된 표정과 예민한 몸짓으로 소화하며, 그의 불안과 죄책감, 의심과 집착을 설득력 있게 구현한다. 그의 눈빛 하나, 무표정한 얼굴의 미세한 변화만으로도 캐릭터의 내면은 극적으로 흔들린다. 이현욱, 이미숙, 이무생 등 조연 배우들도 인물의 복잡한 성격을 자연스럽게 풀어내며 이야기에 힘을 보탠다. 캐릭터 간의 신뢰와 의심이 교차하는 순간순간은 긴장감을 극대화하며 관객의 호흡을 조인다.
또한 영화는 도시의 구조물, 일상적인 공간 속에 은밀하게 설계된 장치를 배치하면서, 우리가 믿고 의지하는 세계조차 언제든 조작될 수 있다는 불안감을 조성한다. 카메라 워크와 편집, 그리고 사운드 디자인 역시 이 설계된 세계에 일관된 긴장감을 부여한다. 특히 ‘사고처럼 보이게 하는 기술’의 세밀한 묘사는 이 영화의 가장 돋보이는 지점이다. 하나의 장면이 단순한 사건이 아니라, 설계자들의 계산된 결과임을 알게 되는 순간마다 관객은 현실과 허구의 경계를 다시 되묻게 된다.
하지만 이 영화는 단순한 스릴러로 끝나지 않는다. 영일의 시선에서 진행되는 이야기는 점차 그의 주관적 시점, 왜곡된 인식, 강박에 가깝게 흐른다. 그는 ‘진실’을 좇지만, 결국 자신이 무엇을 보고 있는지조차 확신하지 못하는 상태에 이른다. 관객 역시 그의 시선에 이입되며 함께 의심하고, 예측하고, 다시 의심하게 된다. 결국 〈설계자〉는 누구나 믿고 있는 세계가 사실은 누군가의 설계일 수 있다는 공포, 그리고 그 설계의 구조가 드러났을 때 개인이 얼마나 무력해질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결말에서 영화는 명쾌한 해답을 제시하지 않는다. 마지막 순간에도 진실은 명확히 드러나지 않고, 모든 의심은 한 겹 더 중첩된다. 이러한 열린 결말은 일부 관객에게는 답답함을 줄 수 있지만, 영화를 다 보고 난 후에도 계속해서 ‘진짜 설계자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곱씹게 만든다. 이는 〈설계자〉이 단순한 이야기 전달을 넘어, 존재론적 질문까지 던지고 있음을 시사한다.
종합적으로 〈설계자〉는 구조적 스릴러와 심리 드라마의 경계에 선 작품이다. 장르적 쾌감을 추구하면서도, 인간 내면의 흔들림을 집요하게 파고들며, 한 편의 정교한 미로처럼 관객을 끌어들인다. 원작의 설정을 토대로 하되, 한국 사회의 권력관계와 정서를 반영한 해석을 통해 독자적인 작품 세계를 구축했으며, 세련된 연출과 밀도 높은 연기, 의미 있는 메시지까지 고루 갖춘 수작이라 할 수 있다. 다만 복잡한 구조와 열린 결말에 대한 호불호는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생각할 거리 많은 스릴러, 설계된 세계 속 인간의 본질을 되묻는 영화로서 〈설계자〉는 충분한 인상을 남긴다.